6장 뒤따라 나온 현지와 함께 복도를 걷던 나는 저편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여학생 한 명과 마주쳤다. 이상한 나라로 향하는 백색 토끼처럼 급히 어디론가 향하는 한 여학생. 온몸에 바쁜 기색을 잔뜩 칠하고 복도를 걷던 그 여학생이 유미였음은, 그저 우연에서 비롯된 일이었을 것이다. 유미: “아, 학예제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나를 발견하자마자 가던 길을 멈추고선 내게 말을 걸어오는 유미. 나는 그렇다고 말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미는 나의 옆에 서 있던 현지를 가볍게 스캔하고선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미: “학교에서 보는 건 또 오랜만이네.” 나: “그러게. 넌 어디 가는 거야?” 유미: “응, 잠시 교무실 들렀다 오는 길.” 나: “이래저래 바빠 보이네.” 유미: “뭐어, 매번 그렇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유미의 얼굴에는 어딘가 껄끄러운 표정이 덧대져 있었다. 현지: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유미: “아니, 별일은 아니고. 올해 학예제 폐회식때 불꽃놀이 하기로 했었잖아. 그런데 며칠 전에 불꽃놀이를 담당할 불꽃부에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지 뭐야. 그래서 불꽃놀이를 담당할 사람이 새로 필요하다나…….” 현지: “그거 큰일 아니에요?” 유미: “으음, 학예제때 쓸 불꽃은 다 만들어 놓아서 완전 큰일난 정도까진 아닌데, 일이 귀찮아진 거지. 누군가가 불꽃놀이 진행 순서도 짜야 하고, 당일날 불꽃도 다뤄야 하니까.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 일을 내가 맡게 된 거고.” 나: “지금도 엄청 바쁘면서, 그런 일까지 맡게 된 거야?” 유미: “그러게 말야……. 그치만 하려는 사람도 없었던 데다가 다들 내가 했으면 하는 눈치였기도 해서. 앗, 이제 가봐야겠다. 다음에 봐~” 나와 현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선 복도 저편으로 총총 사라지는 유미. 현지는 그런 유미를 조금은 안쓰러운 티를 내비치며 바라보고 있었다. 현지: “유미 언니 많이 피곤해 보이죠?” 나: “그러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텅 빈 복도를 걷는 것밖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현지와 함께였다. 불어오는 바람은 점점 투명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한여름의 바람이 무언가를 잔뜩 머금고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과 달리, 한겨울의 바람은 쌩하는 소리와 함께 가벼이 불어오니 말이다. 학교 앞 신호등에 멈춰 서, 나는 버릇처럼 옆을 바라보다 말고 현지와 눈을 마주쳤다. 마침 현지도 나를 기웃기웃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현지: “이제 학예제 준비도 다 끝났는데, 남아있는 방학은 어떻게 보낼 생각이에요?” 나와 눈을 마주친 현지가 곧장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 “글쎄. 생각 안 해봤는데.” 열흘 정도의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현지: “유령은 다시 찾을 생각 없어요?” 나: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있어야 말이지. 어딨는지도 모르고, 연락할 방법도 없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 “그나저나, 왜 내 눈에만 그 유령이 보였던 걸까?” 혼잣말처럼 내뱉은 그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건 몇 초 정도 뒤의 일이었다. 신호등을 건너며, 나는 적당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중얼거렸다. 나: “역시 그저 우연이었던 거겠지?” 현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죠. 필연적이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다시 한번 옆을 바라보았다. 횡단보도를 절반쯤 걸었을까, 초록빛을 발하는 보행자 신호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나: “그럼, 내가 여기로 오게 된 것도 필연이었을까?” 현지: “글쎄요.” 나: “내가 유미와 마주치고, 너와 같은 동아리가 된 것도?” 현지: “하지만 단순한 우연일 뿐이라도 상관없잖아요?” 우연이라든가, 운명이라든가 하는 단어를 곱씹는 사이 횡단보도가 끝이 났다. 세 방향의 갈림길에서, 나와 현지는 같은 길목으로 접어든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는 듯, 현지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현지: “사람은 우연과 필연을 구분하지 못하니까요. 그러니까 우연이든, 필연이든 모두 소중한 거 아닐까요.” 나: “그렇긴 하네.” 다시금 옆을 돌아보며, 현지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눈동자는 눈동자일 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죽음의 색이라거나, 인간의 운명이라거나. 어쩌면 우연과 필연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일종의 축복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기억 나? 그 유령이 네 눈에서 강렬한 죽음의 색이 보인다고 했던 거.” 나의 말을 듣자마자 현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자그마한 목소리로, 현지가 털어놓듯 말을 꺼냈다. 현지: “선배는 이미 죽었어야 할 저를 구해준 거예요.” 나: “애초에 나 때문에 위험에 빠진 거잖아. 내가 아니었으면 텔레이도스코프를 만들 일도 없었을 테고.” 현지: “반대로 생각해보면, 선배가 제 운명에 휘말린 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건 운명에 휘말린 게 아니라 서로의 운명이 얽혀있는 거라는 말장난같은 이야기를 꺼내려다 말고, 나는 그대로 그 말을 삼켜버렸다. 현지의 말이 맞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의아했던 사건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서 그것 나름대로의 이유와 함께 맞아 떨어져가고 있었다. 석양이 비치고, 어둠이 차츰 하늘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하루가 저무는 걸까. 게임이나 영화 감상같은 시간을 죽이는 일이 너무나도 무의미하게 느껴져서였는지,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수밖엔 달리 할 일이 없어 보였다. 이러고 있자니 정말 태엽이 다 풀려버린 인형처럼 보이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몸을 비틀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려다 말고, 나는 침대와 탁자 사이에 떨어져 있던 인형 하나를 발견했다. 어느새 시간은 소녀의 흔적에 먼지가 묻을 만큼 흘러가 있었다. 팔을 뻗어 인형을 주워들었다. 깔끔하게 마감이 된 테루테루인형. 분명 내가 만든 인형이었다. 소녀는 그때, 내가 만든 인형을 보기 좋게 골랐던 것이다. 나: ‘뿌듯해해야 하는 건가.’ 탁자 위에 인형을 올려두고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소녀도 이 인형처럼 어딘가에 홀로 남겨져 시간을 죽이고 있겠지. 어제도, 그제도, 소녀는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소녀는 시간을 죽일 것이다. 어쩌면 내년도, 내후년도…….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진동 소리에 눈길을 옮겼다. 휴대용 태블릿에 문자 한 통이 방금 막 도착해 있었다. 이런 시간에 내게 문자를 보낼 사람이 현지 말고 있었던가. 손을 뻗어 태블릿을 집어 들고선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유미: 혹시 지금 학교로 와 줄 수 있어? 문자를 확인한 나는 고개를 돌려 베란다 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땅거미가 진 어스레한 지금, 갑자기 유미가 내게 문자로 이런 부탁을 건네왔다는 게 신기해서였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침대에서 일어나 학교로 향할 채비를 하며, 나는 유미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 이 시간에 갑자기 학교는 무슨 일로?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다시금 문자가 도착했다. 유미: 어쩌다 보니 1층 창고에 갇힌 것 같아서. 나: 갇혔다고? 어쩌다가? 유미: 학예제 비품 정리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안에 사람이 없는 줄 알고 잠가버렸나 봐. 나: 그럼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던 거야? 답장을 기다리며 학교를 향해 약간은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길을 걷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유미의 답장이 늦는 것 같았다. 나: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런 내용의 문자를 보내고 난 뒤였다. 몇 분을 더 기다려도 답장은커녕 내가 보낸 문자를 유미가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선, 나는 발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평소 같았다면 별일 아닐 거라 여기며 천천히 학교로 걸어갔을 테지만, 나도 모르는 새 비현실에 물들어버린 걸까. 십여 분 정도를 뛰어 학교에 도착한 나는 교무실에서 열쇠를 챙겨 곧장 아래층의 비품 창고로 향했다. 서투른 손길로 비품 창고의 열쇠를 꺼내 들고선 열쇠 구명에 욱여넣자 덜컥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 “거기 있어?” 분명 이곳에 있다고 했었을 텐데, 어째서인지 비품 창고는 불도 켜지지 않은 채 정적에 잠겨있었다.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켜자, 순식간에 비품 창고의 윤곽이 드러났다. 유미의 흔적을 찾아 주변을 훑어보았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그녀의 온기를 좇아 시선이 향한 곳은 비품이 잔뜩 쌓여있는 박스 더미 뒤편이었다. 나: “다 보이거든, 뒤에 숨어 있는 거.” 혹시나 큰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심장이 조금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박스 더미 뒤편에서 자신의 갈색빛 머리카락을 미처 숨기지 못하고 쪼그려 앉아있던 유미가 나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유미: “에이, 놀래켜주려고 했는데. 벌써 도착해 버렸네.” 나: “그래서 일부러 문자도 안 받고 있었던 거야?” 허무한 듯한 목소리와 불만이 묻어나는 투의 목소리가 서로에게 교차한다. 유미: “응? 아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하필 그때 태블릿 배터리가 방전되어 버렸지 뭐야.” 멋쩍은 웃음과 함께, 유미는 주머니에서 작동하지 않는 태블릿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반쯤은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유미가 내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유미: “왜 그래? 혹시 나 걱정하고 있었어?” 나: “그거야 당연히, 덜컥 연락도 끊겨 버렸으니까…….” 유미가 내게 한 발짝 더 다가오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뒤로 한 발짝 물렸다. 학교까지 뛰어오느라 숨이 차는 바람에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던 심장이 곡해의 여지를 남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는지는,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걱정이라는 말은 분명히 신경 쓰일 정도로 뛰고 있던 내 심장에 자극적으로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나: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유미: “응? 이런 기분이었겠다니?” 나: “걱정 끼친다는 거 말이야.” 유미: “뭐야, 걱정해 준 거 맞았네~” 나: “어쨌거나 다행이다. 별일 없어서.” 긴장이 사그라들자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먼지가 적당히 내려앉은 비품 창고에 쪼그려 앉아, 나는 잠시 그곳의 퀘퀘한 공기를 묵묵히 마셨다. 회색으로 정의될 만한 가라앉은 공기가 조잡하게 뛰고 있던 나의 심장을 조금씩 진정시키고 있었다. 유미: “밖엔 누구 없었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캠프파이어에서의 모닥불처럼 유미를 바라보고 있던 나의 곁으로 그녀가 다가왔다. 나: “이 시간에 학교에 누가 남아있다고. 아무도 없었거든.” 유미: “그래?” 미묘하게 핀잔 섞인 투의, 걱정하는 차원에서의 대답이 유미에게는 어떻게 건네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바로 옆으로 다가선 유미는 그대로 바닥에 몸을 주저앉혔다. 눈을 둘 모닥불이 사그라든 나의 시선이 허공을 뱅뱅 맴돈다. 유미: “그럼 여긴 우리 둘밖에 안 남은 거네.” 나: “…… 갑자기 그게 뭐야.” 그런 이야기를 꺼내고 얼마가 지났을까. 회색의 공기가 어색함에 힘입어 무게를 더하고 있을 때쯤, 유미가 갑자기 일어서서는 창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하긴, 비품 창고 안에서 얼마나 더 앉아있으려는 건지. 이제 슬슬 밖으로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덜컥 하는 소리가 문에서 들려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나: “…….” 유미가 내게 다가온다. 그저 텁텁하게만 느껴졌던 창고의 공기가 한순간에 싸늘한 입김으로 변해 나를 옭아맨다. 온몸이 순식간에 고치가 된 것처럼 칭칭 엉겨붙은 듯한 감각. 일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느꼈던 그 심상찮은 감각이 나를 죄여왔다. 유미: “저기―――” 제 궤도를 되찾아가던 심장박동은 여태까지의 호흡이 무색할 정도로 쿵쾅거리고 있었다. 바닥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걸어오던 유미가 사라졌다. 눈앞에서 유미만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시야에 보이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호흡이 가빠져 왔다. 혹시 이곳에는 호흡할 만한 공기조차 남아있지 않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려는 찰나, 어디에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명: “기다리고 있을게.” 그 목소리를 신호로,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나: “…… 어째서?” 그곳에는,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오직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소녀는 나의 눈앞에서 아스라이 사라져갔다.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나: “우왓―――” 정신이 들었다. 그대로였다. 퀘퀘한 밀실의 공기도, 나의 곁에 있던 유미도. 나는 허공을 향해 뻗으려던 손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두며 유미를 바라보았다. 유미: “…… 왜 그래?” 나: “…… 나, 폐소 공포증이 있어서.” 유미: “앗, 정말? 미안, 그런 것도 모르고…….” 나: “괜찮아. 일단 밖으로 좀 나가자.” 유미: “으응…….” 숨을 크게 두어 번 정도 내쉬었지만, 두 번의 호흡 모두 미묘한 떨림을 이루고 있었다. 어째서였을까. 그 짤막한 순간 나의 앞에 소녀가 나타났던 건. 그리고, 기다리고 있겠다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 건……. 나: “그나저나,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던 거야?” 유미: “그게,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말야. 학예제때 쓸 물건들 정리하다 보니까 그만…….” 나: “그렇구나.” 단둘만이 남겨진 학교 복도에는 묘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평소에는 항상 이런저런 소리로 가득 차 있던 복도는 단 두 사람만의 소리로는 가득 차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려는 즈음이었다. 유미: “아, 아니, 그러니까, 이건…….” 복도를 걷던 유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선다. 어디선가 들려온 꼬르륵대는 소리가, 나와 유미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것이다. 나: “그러고 보니 여태껏 저녁도 안 먹었겠네.” 유미: “아, 아냐! 그렇게 배 안 고파. 이건 그냥 배가 제멋대로…….” 나: “그래? 난 배고프던 참이었는데.” 손사래를 치던 유미는 나의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반응했다. 유미: “으응……? 아직 저녁 안 먹어? 저녁 시간은 한참 지났는데.” 나: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저녁 시간을 그만 놓쳐 버린 거 있지.” 유미: “생각할 거?” 나: “뭐어…… 그런 게 있어.” 그런 이야기를 하며, 나는 짤막한 웃음을 유미에게 흘려 보였다. 웃음에 약간은 멋쩍은 기색이 묻어있던 건, 방금 전 창고에서 보았던 소녀의 허상이 떠올라서였을까. 유미: “그럼 우리 저녁 같이 먹을래?” 나: “그럴까.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유미: “음…… 나 갑자기 파스타 먹고 싶어졌어!” 나: “그럼 그러는 걸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메뉴가 정해지고, 나의 앞으로 폴짝 뛰어 앞장서게 된 유미가 내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유미: “배고파, 빨리 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던 여학생은 어디로 간 건지. 가벼운 웃음을 내뱉고선 그대로 걸음을 서두르려는데, 눈앞에 놓인 유미의 손길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나: “…….” 팔 아프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한 눈치일까. 나는 엉성하게 유미가 건넨 손을 붙잡고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게 되어버렸다. 하굣길을 따라 몇 분 정도를 걸었을까, 사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식당 하나를 가리키며 유미가 말했다. 유미: “아, 저기다, 저기.” 나: “분위기 좋아 보이는 레스토랑이네.” 유미: “얼른 들어가자~” 어느새 나의 등 뒤에 서 있던 유미에게 떠밀려, 나는 계단을 올라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있었다. 문을 열자 아늑한 고딕풍의 분위기가 에어컨 바람에 뒤섞여 느껴졌다.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식당에는 나와 유미 단둘밖에 없는 듯했다. 유미: “가족이랑 같이 왔을 땐 사람이 제법 많았었는데, 밥때가 지나서 그런가. 되게 썰렁하네.” 식사 시간을 놓쳐 식당을 찾는 일이 요즘 들어 잦아진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유미: “우리 저기 앉자. 어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유미의 손가락이 향하던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나: “창가 자리 말하는 거야?” 유미: “응, 전에 가족이랑 왔을 땐 항상 저 자리엔 손님이 있어서 못 앉아 봤었거든.” 분위기에 심취한 듯 들뜬 미소를 흘리는 유미. 유미가 가리킨 창가 쪽 테이블은 달빛에 물들어 어스름한 상아색으로 적셔져 있었다.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유미를 따라 창가 좌석에 자리를 잡고선, 메뉴판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 “여긴 뭐가 맛있어?” 유미: “난 이거 좋아하는데, 요것도 맛있고, 이것도 맛있어.” 나: “그러게, 다 맛있어 보이네.” 메뉴판을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는 결정을 내릴 수 없어 다시금 메뉴를 확인하려는데, 맞은편에서 유리잔이 짤그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서는, 유미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옆에 얌전히 놓여있던 와인잔을 만지작대는 중이었다. 유미: “우리 와인 한 잔 안 할래?” 나: “…… 갑자기 웬 와인이야.” 유미: “왜, 분위기도 좋은데.” 어른인 척하고 싶기라도 했던 걸까. 그렇다면 목적과는 동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진 어린애같은 웃음을 지은 채, 유미는 내게서 메뉴판을 뺏아 들었다. 유미: “와아, 하나같이 모르는 이름들투성이네.” 나: “어차피 시키지도 못하는 것들이잖아.” 유미: “왜?” 나: “그야 당연히, 우린 학생이고…….” 곁눈질로 눈치를 주듯, 나는 유미의 교복을 바라보았다. 유미는 자신의 옷차림을 훑어보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유미: “네가 주문하면 되잖아?” 나: “나도 학생인데.” 유미: “에이, 학생처럼 안 보이는걸? 교복도 안 입고 있구.” 나: “누가 봐도 학생이잖아?” 유미: “쉬―――잇, 들리겠어!” 테이블 반대편의 주인 아주머니를 힐긋힐긋 바라본 유미가 눈치를 주며 말했다. 유미: “휴, 다행히 여기 말소리는 안 들리는 모양이다.” 나: “…… 진심으로 주문하려고?” 유미: “그럼, 당연하지. 사고만 안 치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 요즘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쓴다고~” 걱정 말라며 웃음을 흘리는 유미였지만, 불안하지 않을 리가 있나. 유미는 그런 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게 다시 메뉴판을 내밀며 물었다. 유미: “뭘로 주문할 건지는 정했어?” 나: “응, 이걸로 하려고.” 유미: “그럼 난 이걸로 할게. 이거랑 이거, 와인은 요걸로 주문하면 되겠다.” 나: “…….” 유미: “헤, 주문 부탁할게!” 부탁한다고는 해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 “저기요―――”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어느새 손을 들어 주문을 하고 있었다. 나: “여기 이거…… 하고, 콜라 한 병 주세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힐긋힐긋 시선을 돌리며 아주머니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지만, 정말 유미의 말대로 주문을 받은 아주머니는 별다른 말도 없이 메뉴판을 들고선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나: “후아, 앞으로 이런 거 시키지 말아줄래.” 미뤄두었던 호흡을 연달아 내쉬어대는 나를 바라보며, 유미는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거리고만 있었다. 유미: “아, 그나저나 콜라는 왜 시킨 거야?!” 나: “나는 술 안 마실 거거든. 마실 거면 혼자 마셔.” 유미: “뭐야아아…… 재미없게.” 불만 가득한 입모양을 한 채, 양팔에 반쯤 얼굴을 파묻고선 나를 바라보는 유미. 마냥 뾰루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조명에 비치는 유미의 얼굴에서는 알게 모르게 피로감이 잔뜩 느껴졌다. 유미의 반쯤 감긴 눈꺼풀은, 티 날 정도로 무거워 보였다. 나: “피곤해보이네.” 유미: “어라, 그렇게 보여?” 나: “으음…… 조금?” 그러자 유미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마치 자신은 전혀 피곤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나: “비품 창고 정리는 언제부터 하고 있었던 거야?” 유미: “으음…… 너희랑 마주치고 헤어진 뒤부터?” 나: “그럼 피곤할 만도 하잖아…….” 유미: “아하핫, 괜찮아, 괜찮아.” 알듯 말듯한 표정이 유미의 얼굴을 스친다.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고선, 나는 턱을 괴고는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얼핏 고개를 돌려 바라본 창밖에는 반쯤 감긴 달이 하나, 그리고 듬성듬성 빛을 발하는 별이 손에 꼽을 만한 수로 하늘에 매여 있었다. 원래라면 하늘에 수놓여 있어야 할 별들은 모두 땅에 떨어져 버린 걸까. 그다지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은 야경이었지만, 밝다는 인상이나 반짝인다는 느낌은 분명히 내게 전해진 듯했다. 유미: “분위기 있다. 그렇지 않아?” 나: “그러게. 괜찮은 것 같아.” 유미: “하늘에 별만 좀 더 밝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미소가 유미의 입가에서 새어 나오고, 그녀의 미소에 나 또한 아쉬운 미소로 답장을 전한다. 각자 다른 이유에서의 아쉬운 미소였겠지만 말이다. 아쉬운 빛이 서려 있던 웃음을 가벼운 말소리로 덮어간다. 그 날, E구역에서 보았던 그 별빛을. 언젠가 유미에게 보여줄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기다리던 음식이 나오고, 유미의 태블릿에서 찰칵 하는 셔터음이 들려온다. 유미: “맛있겠다~” 파스타에 손을 대기 전, 유미는 신성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선 와인병을 열기 시작했다. 나: “진짜 마시게?” 유미: “이런 곳에 오면 와인 같은 거 꼭 마셔보고 싶었거든.” 와인잔에는 천천히 자색 액체가 꼴꼴대는 소리를 내며 부어져가고 있었다. 익숙한 포도향의 끝에는 익숙하지 않은 알코올의 자취가 희미하게 남아 코끝을 간질였다. 유미: “그리고…….” 뭐라 말할 틈조차 주지 않은 채, 유미는 자신의 입가로 와인잔은 가져댔다. 붉은 와인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와인잔을 입에서 뗀 유미가 눈을 깜빡였다. 유미: “어라, 이게 어른의 맛인가?” 나: “…… 어떤 맛인데?” 유미: “궁금하면 너도 마셔봐~” 나: “됐거든요.” 기분 좋은 웃음을 키득키득 내뱉은 유미는 오물오물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는지, 평소라면 천천히 비어갔을 유미의 접시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바닥을 보여갔다. 한 잔째, 두 잔째, 와인 병도 조금씩 비어가고 있었다. 나: “…… 괜찮겠어?” 유미: “에이, 와인 한 병으로 취하게써?” 나: “이미 조금 취한 것 같아 보이는데…….” 유미: “에헤헤, 전혀요~” 와인 한 잔을 다시 비운 유미는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고선,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미: “정말로 안 마실 거야? 이제 반도 안 나맛는데…….” 나: “안 마셔요.” 유미: “겁쟁이다, 겁쟁이~” 어른스럽지 못한 웃음을 키득대며, 유미는 와인잔에 자색 액체를 다시금 채워갔다. 유미: “나도 그런데 말이야.” 그러고는 잔에 가득 든 와인을 단번에 꿀꺽꿀꺽 삼켜버리고는, 붉게 변한 얼굴을 내게 가까이 가져댔다. 흐릿한 조명에 비치는 유미의 얼굴은 마치 와인이 가득 담긴 잔에 비친 것처럼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유미: “나도 겁쟁이라서, 용기가 없어서 맨정신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도 제대로 못 하거든.” 나: “…….” 유미: “난 왜 이렇게 겁이 많은 걸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제대로 못 하고…….” 알코올에 잠겨가듯, 유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다시금 얼굴을 팔 속으로 푹 파묻어버렸다. 나: “저기, 완전 취한 것 같은데.” 유미: “갠차는걸……? 아직 와인도 남아있고…….” 팔을 뻗어 와인병을 찾으려는 유미. 나는 유미의 손에 붙잡힐 뻔한 와인병을 구해내고는 유미로부터 닿지 않는 거리에 옮겨두었다. 유미: “와앗, 돌려줘어어―――” 나: “엄청 취해 보여. 이제 슬슬 나가 보는 게…….” 유미: “그 와인 다 마시기 전까진 안 나갈 거거든?” 나: “야아.” 유미: “흐으으음――― 어떡할 거야?” 나: “어떡하긴 뭘 어떡해.” 유미: “나 그 병에 있는 와인 다 마시기 전까지는 안 움직일 거라니까~?” 넌센스 퀴즈를 내고 싶기라도 한 건지. 아무래도 유미는 알코올 기운에 완전히 잠식된 것 같아 보였다. 더 이상 마시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미의 얼굴은 새빨개 보이기도 했다. 유미: “이대로 공주님 안기로 집까지 바래다주는 건 어때?” 나: “…… 그건 기각.” 유미: “왜애에?” 나: “무겁단 말이야――― 아야, 발로 차지 마.” 유미: “안 움직일 거야. 알아서 해.” 나: “후, 정말…….” 토라진 티를 잔뜩 내며, 유미는 테이블에 얼굴을 찰싹 붙였다. 나: “이 와인병만 다 비우면 되는 거지?” 유미: “와아, 흑기사 출동~” 눈을 질끈 감고선, 그대로 한 잔 가득 따른 와인을 꿀꺽꿀꺽 마셔 버렸다. 유미: “어때?”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유미: “그럼 한 잔 더~” 순식간에 병에 들어있던 와인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두 번째 잔을 비우고선 멍한 얼굴로 유미를 바라보았다. 유미: “지금은?” 나: “괜찮은 것 같아.” 유미: “에이, 뭐야아. 재미없게.” 뭔가 김이 새어버렸다는 듯 투덜대는 유미. 나는 그런 유미를 여전히 멍한 시선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유미: “여태껏 술 마셔본 적 있었어?” 나: “아니, 한 번도 없는데.” 유미: “그럼 이번이 처음인 거네?” 나: “으응, 그렇지.” 유미: “헤헤, 어쨌거나 공범이다. 공. 범.” 나: “이거, 나쁜 짓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었나…… 공범이라는 말은 너무한데.” 유미: “그치만 왠지 나쁜 짓 잔뜩 하고 싶은 기분인걸?” 슬슬 일어나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유미: “아까 내가 이야기했던 거 기억해?” 유미의 목소리가 나의 몸을 붙잡았다. 유미: “맨정신에는 이야기 못 하는 거, 지금 하고 싶은데.” 그 목소리를 신호로 삼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나: “…….” 유미: “있지, 나 말이야. 너를―――” 심장이 유별나게 뛰는 것도, 감각이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것도 방금 전 비품 창고에서 겪었던 것과 꼭 같은 현상이었다. 다만, 그 순간 느끼는 감각만큼은 무언가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두려움에 쿵쿵댔던 심장이, 지금은 또 다른 무언가의 감정에 의해 뛰고 있었다. 나의 눈과 귀가 그 감각에 의해 멀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그 감정을 끝까지 붙잡을 수 없었다. 그 감각이 급작스럽게 뇌에 투여된 알코올과 함께 이루어낸 허상이 나의 눈앞에 펼쳐지고 난 뒤에도 말이다. 익명: “있지, 나 말이야. 너를―――” 모호한 목소리로부터 시작되는 허상이었다. 무슨 의미인지도,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확실치 않은 그 목소리는 흐릿해졌던 기억들과 어울려 들뜬 화음을 이룬다. 유미가 내게 건넸던 말의 조각과 내 기억의 조각이 어울려 자아낸 화음인 걸까. 하지만 그 화음은 끝내 마침표에 달하지 못하고 연주를 멈춘다. 그리고 화음이 그려낸, 알코올의 이상한 가역반응이 만들어낸 허상 속의 누군가가 나에게――― 소녀: “기다리고 있을게.” 나에게, 연주의 끝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건넸다. 허상이었지만, 너무나도 또렷한 장면이었다. 너무나도 진실되고 따뜻한 한 마디였다. 하지만 소녀가 내게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는 그 모습을. 나는 어째서 지금 이 순간 그려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게 건네진 그 목소리는 미처 끝까지 닿지 못했던 연주의 끝을 대신 장식하기라도 하듯 나를 검고 꽉 막힌 공간으로 안내했다.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허공을 붙잡듯 내저은 나의 손은, 잃어버렸던 기억의 한 조각을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 기억의 조각은 소녀를 가리키고 있는 걸까. 소녀에 대한 미련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려는 순간. 유미: “야아, 고작 그거 마시고 취한 거야~? 난 아직 안 취했는데…….” 나: “아, 그게…….” 알코올이 만들어낸 환상에서 깨어나 버렸다. 유미: “중요한 거 이야기하려 했다고―――” 나: “일단 일어나자. 돌아가는 길에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계산서를 챙겨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자, 유미도 '어쩔 수 없네'라는 표정을 짓고선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나: “계단 내려갈 수 있겠어?” 유미: “으응……? 당연하지?” 당연하다고 말하기엔 유미의 휘청이는 걸음걸이가 너무 위험해 보였다. 유미: “나 하나도 안 취했다니까아앗―――” 나: “…… 부축해 줄게. 조심해서 내려가자.” 유미: “흐으으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유미는 군소리 없이 나의 어깨에 붙어 부축을 받아 주었다. 한 가지 문제점이라면 계단이 끝나고 거리로 나온 뒤에도, 나의 어깨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 그 정도겠지. 유미는 잔뜩 취한 몸을 나의 어깨에 기댄 채 밤거리를 걸었다. 유미: “저기, 저기 좀 봐~” 집을 향해 걷던 도중, 유미는 난데없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미: “저 별 말이야. 되게 특이하지 않아?” 유미가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옮긴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유미가 가리킨 별을 찾을 수 있었다. 무미건조한 밤하늘에는 수수하다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고작 몇 개의 별만이 어렴풋이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나는 그리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름 모를 별 하나를, 잘 모르겠다는 듯 유미와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곧이어 유미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미: “저거 말이야, 쌍성 아닐까?” 나: “쌍성?” 유미: “으응. 하늘에 떠있는 별 중에는 짝이 있는 별이 있댔거든~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나: “으음…….”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선 유미가 가리킨 별을 빤히 응시했다. 쌍성이라면 아주 가까이 붙어 있는 두 별을 의미하는 걸까? 밤하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나는 별빛의 갈래를 찾아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미간이 아파 올 정도로 눈을 찡그려 별빛을 뚫어져라 관찰해 보아도 유미가 가리킨 별은 밤하늘에 홀로 덩그러니 놓인 것만 같아 보였다. 나: “…… 이거 몇 개로 보여?” 하늘을 바라보며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유미에게, 나는 손가락 하나를 펼쳐 들고선 흔들어 보였다. 유미: “히, 두 개 아니야?” 나: “많이 취한 것 같네…….” 유미: “많이 취한 거 아냐~ 그냥 조금 들뜬 거라니까?” 나: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조심해서 걸어.” 유미: “에헤헤…….” 그 말을 듣자, 유미는 기다렸다는 듯 나의 어깨에 몸을 조금 더 기대왔다. 재잘거리던 유미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의 등에 업혀있던 누군가를 흔들어 깨우며, 나는 유미에게 일어나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 “야아. 집에 다 왔어. 정신 차려.” 유미: “으응?! 내가 언제 정신 놓았다고 그래?” 나: “드디어 일어났구만.” 여덟 번째 외침이 드디어 귀에 닿았는지, 유미는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미: “여긴 어디야?” 나: “어디긴, 네 집 앞이지.” 꿈 속을 헤매기라도 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유미. 유미는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근처를 이리저리 배회하더니 이윽고 나의 앞에 멈춰 섰다. 유미: “신기하다. 꿈 속을 걸어다니는 것 같아.” 나: “꿈 아니거든…….” 유미: “그러게. 아쉽다. 꿈이었으면 지금 바로 이야기했을 텐데.” 알듯 말듯한 이야기를 내뱉은 유미는 방향을 틀어 건물 입구로 향했다. 하늘하늘 손을 양옆으로 흔든 유미가, 이에 발맞춰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나는 유미가 자동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본 뒤에서야 겨우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나: “으음…….” 얼굴을 가볍게 찡그리고는 체내에 미묘하게 남아있는 알코올 기운을 가늠하려 했다. 생각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겠지, 라고 생각하며 길을 걸으려 했지만 옷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누군가의 잔재가 생각을 자꾸만 방해하고 있었다. 한 명의 것이라 생각되었던 잔재는 숨을 들이마시며 생각에 잠기려 하자 단숨에 두 명의 것이 된다. 마음에 걸리는 것들투성이다. 유미: “그러게. 아쉽다. 꿈이었으면 지금 바로 이야기했을 텐데.”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거꾸로 기억을 이어나간다. 유미: “중요한 거 이야기하려 했다고―――” 유미가 이야기하려 했던 중요한 것이라니. 유미: “맨정신에는 이야기 못 하는 거, 지금 하고 싶은데.” 몇 걸음 떼지 않았는데, 희미하게 남아있는 알코올 때문이기라도 한 건지. 발걸음을 멈추었다. 멈추어버린 발걸음처럼, 생각도 이어지지 않았다. 유미: “있지, 나 말이야.” 익명: “너를―――” 나: “아냐, 아냐, 아니라고.” 소녀: “기다리고 있을게.” 머릿속에서 하릴없이 변주된 목소리는 이번에도 소녀를 가리키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아무도 없는 저편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두 명째의 잔재가 다시금 나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지나가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나를 힐긋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익숙함을 느낀다. 허무하리만치 느껴질 정도의 편안함이, 나를 감싸안고 있었다. 나: “…….” 어째서일까?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그런 말을 했을 리도 없는 소녀가. 내게 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기억 속에서 속삭였던 것일까? 골몰하면 골몰할 수록 정답과는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 “우윽…….” 뒤늦은 술기운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알코올의 영향력이 스멀스멀 몸에 퍼지자, 온몸이 느슨해지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물감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나는 소녀에게 약속했던 게 아닐까? 언젠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에. 나는 소녀에게 '기다려 달라'는 이야기를 건넸던 건 아니었을까. 나: “…….” 하긴, 그럴 리가 없지. 결함투성이 망상을 멈추고는 그와 함께 움직이지 않고 있던 발걸음을 다시 떼었다. 단순한 망상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가 흐르는 물에 샤워라도 하고 나면 간단히 씻겨져 내려갈 바보같은 망상. 분명 그럴 터인데 말이다. 나는 굳이 이 망상에 가까운 가설의 증명을 소녀에게 맡기고 싶었던 걸까. 소녀를 만나고 싶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소녀를 찾아, 나는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생각을 요구했다. 소녀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발걸음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어느새 터미널에 도착해 F구역으로 향하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정말 만에 하나 소녀가 나에게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남겼다면. 어쩌면 소녀는 여전히 E구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비상식적인 생각이었지만, 비상식적인 행동에는 비상식적인 이유가 따르기 마련이라며 나는 무작정 열차에 탑승해버린 뒤였다. 열차를 타고 F구역에 도착해 E구역으로 향하는 샛길을 찾는 건 단숨이었다. 골목길 끄트머리에 위치한 흐트러진 철조망. 정말 이곳 너머에 소녀가 있는 것일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찰나의 고민에 빠졌다. 나: “여기까지 와서 고민은 무슨 고민이야.” 왠지 어디선가 나를 향하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소녀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돌아가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철조망을 넘어 어둠이 짙게 깔린 좁은 길목으로 몇 걸음을 걸어가자, 처음에 왔을 땐 단번에 발견하지 못했던 여러 갈래의 빛이 나를 반겼다. 별빛이었다. 소녀와 함께 보았던, 하늘을 가득 수놓은 별빛. 그 풍경을 바라보자, 오직 소녀의 생각만으로 가득하던 머릿속에 또 다른 한 명의 이름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 ‘이럴 줄 알았으면 유미도 같이 데려올 걸 그랬나.’ 무수히 많은 저 별빛의 틈 속에는 유미가 가리켰던 그 이름 모를 별도 섞여 있겠지. 밤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떨구고는, 등 뒤를 힐긋 바라보았다. 역시, 누가 있을 리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머쓱한 웃음을 흘리려는데. 그쪽에서 들려온 바스락대는 소리가 나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 “…… 거기 있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한 발짝 걸음을 떼자, 다시금 발자국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선명하게 들려온 그 발자국 소리는, 나로부터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마치, 나를 피하려는 듯 말이다. 나: “잠깐만! 기다려! 할 말이 있어!” 멀어져가는 발자국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뛰었다. 흐릿하게 흩어져가는 발자국 소리 역시 나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속도를 더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와 똑같았다. 소녀와 나의 짧았던 첫만남의 순간처럼.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흔적을 뒤쫓았다. 더 이상 불이 들어오지 않는 가로등이 빼곡히 늘어선 좁다란 골목에서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한 뒤에서야, 숨 가쁘게 멀어져가던 발자국 소리가 조금씩 멎어들어갔다. 골목길을 맴돌고 맴돌아 도착한 곳에서 드디어 발자국 소리가 멈추고, 나는 모퉁이를 돌기 전 숨을 고르며 소녀와 마주치고 난 뒤의 일을 고민했다. 소녀와 마주한다면, 무슨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할까? 생각을 정리해보려 했지만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다 빠져버린 나의 몸은 더 이상의 사고를 거부하는 듯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소녀에게 건넬 첫 마디를 생각하던 순간, 모퉁이 너머에서 가벼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또다시 놓쳐버릴 수는 없었다. 생각을 미처 다 정리하지도 못한 채, 나는 그대로 모퉁이를 돌아 그녀와 마주했다. 그저, 이 한 마디를 건네기로 마음 먹은 채. 나: “…… 어라.” 하지만 모퉁이를 돌아 바라본 그곳에는. 나: “네가 어떻게 여기…….” 가쁜 숨을 내쉬는 그녀가 나의 앞에 서 있었다. 유미: “그러는 너는, 이 시간에 이런 곳엔 왜 온 거야?!”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 전개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멍하니 시간이 멈춘 듯 유미를 바라보았다. 나: “어, 음…… 그러니까…….” 잠시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째서 유미가 이곳에 있는 건지. 지금의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을 먹구름처럼 가득 메운 혼란스러움을 걷어내어 보려 애썼다. 어렵사리 입을 뗀 건, 그로부터 제법 긴 침묵이 지나고 난 뒤였다. 나: “사람을 찾고 있었어.” 유미: “이런 곳에서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나: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겠지만.” 유미: “그때 이야기했던 유령을 찾고 있었던 거구나.” 나: “맞아.” 이런저런 부연설명이 더 필요할 줄 알았는데. 유미는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번의 침묵이 잠깐 나와 유미 사이를 감돌았다. 이번에도 먼저 침묵을 깬 건 내 쪽이었다. 나: “여긴 어떻게 알고 따라왔어?” 유미: “음…… 어쩌다 보니……?” 나: “뭐야, 그게…….” 유미: “에, 헤헤헤…….” 나: “술은 깬 거고?” 유미: “취, 취한 적 없다니까?!” 나: “네에, 네.” 유미: “걱정했다고.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가길래…….” 유미는 여전히 나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미: “미안, 방해해버려서.” 나: “으응……? 방해라니?” 유미: “찾고 있었댔잖아. 그 유령 말이야.” 나: “아냐. 어차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 했고.” 어느새 머릿속을 가득 물들였던 먹색 혼란스러움이 완전히 걷힌 건지.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유미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 “…… 나를 반겨줄 거라고도 생각 안 했어.” 유미: “무슨 일이었어?” 나: “이야기하자면 긴데.” 유미: “듣고 싶어. 시간은 많잖아?” 나: “그렇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떼며, 여태껏 유령 소녀와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처럼 나와 유미가 어색한 곳에서 마주쳤던 그날의 이야기부터, 소녀가 자신을 살인자라 칭하며 나와 헤어지게 됐던 마지막 날의 이야기까지. 그리고 소녀가 사라지고 난 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내 주변을 떠돌던 것까지도.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걸음과 함께, 나는 유미에게 모든 이야기를 정신없이 건네었다. 유미: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비품 창고에서 멍하니 있었던 것도, 내가 뭐라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멍하니 있던 것도.” 나: “그렇지.” 기나긴 이야기가 끝나고 발걸음을 멈춰 세웠을 땐, 어느새 익숙한 장소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 “여기, 별 예쁘지 않아?” 유미: “별……? 와아, 정말이네. 여태껏 모르고 있었어.” 갑자기 웬 별 이야기냐며 고개를 든 유미도 금세 난생 처음 봤을 무수한 별무리에 매료되어 뚫어져라 밤하늘을 응시했다. 나: “저 틈에 네가 아까 말했던 그 별도 숨어 있겠지?” 유미: “저기, 저 별이 아까 내가 말했던 별이야.” 그 별을 찾아내는 것보다 아침이 밝는 게 더 빠를 줄로만 생각했는데, 유미는 나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하늘의 한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별을 헤아리던 나는 고개를 돌려 의아한 눈치를 유미에게 보냈다. 유미: “왜 그래?” 나: “아, 그게…… 저렇게 많은 별들 사이에서 그 별을 어떻게 다시 찾았나 해서.” 유미: “저 별은 북극성이니까. 하늘에서 가장 높이 떠 있는 별을 찾으면 돼. 정확히는 북극에 가장 가까운 별이겠지만.” 북극성이라면 들어본 적 있다. 항해사들이 밤에 길을 찾기 위해 이용했던 별이라고 했던가. 나: “북극성이라면, 폴라리스를 이야기하는 거겠네.” 유미: “폴라리스? 아냐, 저건 알라이라는 별이라고.” 나: “알라이?” 동시에 나와 유미가 서로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미가 알았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마주치며 해답을 제시했다. 유미: “그러고 보니 시간이 지나면 북극성이 바뀌기도 한다는데. 신기하다. 우린 서로 다른 별이 북극성이었을 때의 사람인 거네?” 나: “북극성이 바뀐다니, 그런 건 처음 들어 봐.” 유미: “가장 가까이 있는 게 늘 같을 수는 없잖아.” 나: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넌센스같은 해석이었지만, 그런 유미의 대답은 더 없이 명료하게 와닿았다. 유미: “역시 혼자 빛나고 있구나.” 다시 고개를 들어 북극성을 응시하고 있던 유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이제 술이 좀 깼나 보네.” 유미: “그치만 저 별, 정말로 짝이 있는걸. 쌍성이니까. 물론 여기서 보이진 않지만.” 나: “음…… 그런데 쌍성이라는 게 정확히 뭐야?” 유미: “서로 같은 궤도를 도는 별이라고나 할까?” 나: “신기하네. 별은 항상 그 자리에서 홀로 반짝이는 줄 알았는데.” 유미: “꼭 유령 같지 않아? 눈에 안 보이면서 언제나 붙어 있다니.” 나: “유령…….” 그 단어가 꼭 암구호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멍하니 유미가 가리켰던 알라이라는 별을 바라보았다. 어슴푸레 빛을 발하는 저 별의 뒤편에, 보이지 않는 쌍성이 궤도를 맴돌고 있다. 마치 유령처럼……. 무언가에 홀린 듯 주변을 살폈지만, 텅 빈 공터에는 마른 바람만이 휑하니 불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한여름밤의 꿈이었던 것처럼 소녀가 사라지고, 이제까지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게 되는 걸까? 유미: “그래서, 그 유령 여자애는 더 안 찾을 거야?” 나: “…… 아마.” 유미: “후회할지도 몰라?” 나: “직접 만났다간 더 후회할지도 모르지.” 유미: “정말?” 나: “…….” 유미의 되물음에 명확한 대답을 꺼내지 못한 채, 나는 말을 돌렸다. 나: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유미: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지만, 너도 이유 모를 행동을 할 때 있지 않아?” 그런 일이라면 수도 없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으니까. 나: “나도 후회할 거라고는 생각해. 그리고, 이상하다고도 생각해.” 나: “처음엔 그저 우연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연을 가장했던 필연이었던 것 같아서.” 나: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어.” 나: “누가, 왜 나를 이런 잘 짜여진 각본 속으로 안내했는지, 이 각본의 결말이 무엇일지…….” 유미: “아직 시간은 있잖아.” 나: “네가 나였다면 어땠을 것 같아? 아니, 만약 네가 그 유령 여자애였다면…….” 유미: “그건 대답해줄 수 없는걸. 나는 네가 아니고, 그 유령도 아니니까.” 미궁 속에 빠져 버린 무기력감이 나를 덮쳤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찝찝한 함정을 애써 만들어서는, 왜 나를 그곳에 밀어넣은 걸까. 길을 찾아갈만한 실타래를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허공에서 잡히는 거라고는 무력함이 전부였다. 나: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채로 끝나는 건 싫다고 말하고 싶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나: “모르겠다고. 아무것―――” 그렇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나: “도…….” 알지 못하는 사이, 나는 이미 미궁의 한가운데에 이미 들어서 있었던 걸까. 모든 것이 뒤틀려 인과율이라고는 전혀 상관치 않는 세상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지극히 편의주의적인 전개. 그렇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곳에, 소녀가 있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소녀가, 눈을 마주치고서는 스르륵 발걸음을 돌렸다. 눈을 의심하며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눈앞에서 사라지려는 소녀에게 다급히 말을 건넸다. 나: “잠깐, 기다려줘!” 멀어져가는 소녀를 멈춰야만 했다. 생각해야만 했다. 소녀를 멈춰 세울 한 마디를. 나: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잖아?!” 소녀를 뒤쫓으며, 반사적으로 생각나는 단어들을 기워 붙여 건넸다. 나: “네가, 네가 그랬어. 기다리고 있겠다고.” 나의 목소리가 소녀에게 겨우겨우 전해진 것인지, 앞서가던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멎어갔다. 나: “…… 그래서 너를 찾아 온 거라고.” 그 자리에 멈춰 선 소녀가, 천천히 뒤를 돌아 나에게 얼굴을 보였다. 오랜만이었다. 소녀와 다시 마주하게 된 것도, 소녀의 그 차가운 표정을 보는 것도. 소리 죽인 발자국 소리가 나를 향한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고, 나는 소녀의 모습을 더욱 또렷이 볼 수 있게 된다. 소녀의 호흡이 미세하게 들려오기 시작할 무렵, 나의 앞에 멈춰 선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소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니.” 나: “정말이야. 네가 내게서 사라진 뒤로, 어떤 목소리가 나를 계속 불렀었어. 여태껏 그 목소리가 과거의 기억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목소리는, 네 목소리였어.” 소녀: “말도 안 돼요.” 나: “아냐, 정말이야. 네가 불렀어. 네가 불렀다고. 그래서 찾아온 거라고. 네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으니까…….” 소녀: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떨리는 호흡이 잠시 소녀의 말을 끊어낸다. 정적을 삼키던 소녀는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소녀: “……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의 바람을 간단히 부정하는 한 마디였다. 소녀: “그런 염치 없는 이야기, 했을 리가 없잖아요.” 나: “하지만 텔레파시처럼 들렸는걸. 네 목소리가…….” 소녀: “저한테 그럴 자격 같은 건 없어요.” 나: “자격 같은 게 왜 필요해? 그리고, 그때 이야기했잖아? 헤어질 때 이름 정도는 알려 주겠다면서?!” 소녀: “몰라도 돼요. 살인자의 이름 같은 건.” 소녀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주변을 얼렸다. 여름에서 겨울로, 지금의 계절이 뒤바뀐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와 소녀 사이에는 냉혹하기 그지 없는 기류가 흘렀다. 나: “아니잖아? 살인자라니…….” 정적을 깨기엔 모자랐던 걸까. 나의 목소리가 소녀에게 닿지 못한 채 튕겨져 나온다. 다시 한번, 나는 조심스레 소녀를 향해 말을 건넸다. 나: “같이 돌아가자. 다시 찾아보는 거야. 분명 뭔가가, 잘못된 무언가가…….” 소녀: “아뇨. 제가 있을 곳은 아무 데도 없어요.” 나: “네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잖아?”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녀: “그럴 리 없어요.” 나: “어째서 그렇게 쉽게 부정하는 거야?” 소녀: “그때도 그랬으니까요.” 나: “그때……?” 소녀: “네. '그때'요.” 소녀와 함께했던 일련의 시간들이 단편적으로 머릿속에서 흘러갔다. 하지만 '그때'라니? 천천히 소녀와 함께했던 모든 장면들을 떠올리기엔 너무나도 차가운 침묵이 이를 허락할 것 같지 않았다. 감이 잘 잡히지 않아 기억 속을 헤맬 무렵,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 “같은 방법이었어요.” 소녀가 이야기한 그때란,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소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기억해냈기 때문이에요.” 둔탁한 소리, 그리고 퍼져나가는 붉은색.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겨진 검정. 그 잔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간단했다. 나: “그 연쇄 살인범을 뒤에서 쓰러트린 것도.”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나: “그리고 그곳을 흔적도 없이 태워버린 것도.” 그 붉은색이 더할 나위 없이 따스하게 느껴졌던 건. 나: “…… 역시 너였구나.” …… 어째서였던 걸까? 나: “…….”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똑같은 방법이었다는 말은…….” 소녀: “살아 있었을 때도, 그런 식이었다는 거죠.” 나: “왜 그런 거야?” 더 이상의 시선은 무리라는 듯, 소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힘없이 돌린 고개를 무기력하게 들어 올린 소녀가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그 한 마디보다 먼저, 내겐 소녀의 떨리는 숨결이 닿는다. 소녀: “모르겠어요.” 소녀의 일렁이는 목소리가 힘겹게, 느릿느릿 내게 도착한다. 그 한 마디뿐이었다. 다시금 떨리는 두 명의 숨결만이 텅 빈 공간을 희미하게 메워주고 있었다. 무엇을 모르겠다는 걸까? 자기도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는 후회 섞인 대답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정말 소녀의 기억 속에 살인의 이유가 남아있지 않다는 뜻일까? 소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눈동자를 깜빡일 때마다 물들어가는 소녀의 모습이 눈동자에 맺혀갔다. 알고 있었다. 정답이 무엇인가는, 상관없다. 나: “가지 마.” 물방울져가던 소녀의 모습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직전, 한 발짝 걸음을 떼려던 그녀를 향해 그렇게 말한다. 나: 어찌 됐든 괜찮으니까, 이대로 내 앞에서 사라지지만 말아 줘. 이번엔 내가 한 걸음, 소녀를 향해 다가간다. 바스라지듯 들려온 나의 발걸음 소리에,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소녀가 고개를 돌린다.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소녀가 내게서 고개를 돌렸던 이유를. 소녀: “어째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건가 보다. 소녀: “어째서 저 같은 살인귀를 붙잡고 있는 건가요?!” 쏟아지는 별빛에 휩싸인 소녀의 눈동자가, 조금만 건드려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메말라 버렸을 감정의 자취인지, 쏟아지는 별빛에 휩싸인 빛의 흔적인지 모를 감각의 알갱이가 아른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손을 뻗어 닿는다면 알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다만 차분히 숨을 고르며, 소녀의 들려올 목소리를 기다렸다. 나: “…….” 그녀의 숨결로 가득 찬 이 공간에서, 그 목소리는 아마 어떤 것보다도 빠르게 내게 닿지 않았을까. 분명 몇 걸음 떨어져있는 소녀로부터의 목소리는 그저 눈앞에서 들려오는 울먹임 같았다. 소녀: “어째서어…….” 다시 한번 슬그머니 눈을 피하려는 소녀에게 다가가며, 대답을 건넨다. 나: “좋아하는 것 같아.” 소녀: “네…… 에?” 나: “…… 좋아해. 너를.” 라고, 말이다. 소녀: “…… 장난치지 마세요.” 나: “그런 거 아냐.” 어느새 가까워진 둘 사이의 거리가 이번엔 숨소리가 아닌 나의 심장 박동을 허락한다. 소녀에게 닿은 나의 소리가, 내 목소리와 더해진다.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나의 진심도 소녀에게 가까워졌기를. 그렇게 바랄 뿐이다. 나: “좋아해, 너를. 정말로.” 소녀: “이제 와서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도…….” 나: “미안. 이제 와서 이런 말 해서.”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런 감정이었던 걸까. 너무 늦지 않았던 거라면 좋겠는데.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도, 소녀도, 움직임을 멈춘다.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듯 소녀는 연거푸 얕은 숨을 내뱉았지만,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춰 있기를 바라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 “그렇지만 진심이야. 정말로, 정말 너를 좋아해. 그러니까…… 이대로 끝나는 건 싫어.” 소녀: “왜일까요?”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른다. 소녀: “바보같은 이야기는 그만 두세요―――” 본래라면 거절을 나타내야 할 그 한 마디는, 때늦은 철 떨어지는 여린 봄꽃처럼, 힘없이 나풀거렸다. 소녀: “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죠.” 울고 싶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속에 섞인 복잡한 감정. 소녀의 얼굴에서는 밤하늘의 별을 헤아려야 할 것만 같은, 수많은 감정들이 비쳤다. 소녀: “그렇게 되면, 저도 붙잡고 싶어져 버리잖아요…….” 해석하기엔 너무 많은 감정들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한 가지 정도뿐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만 있던 소녀에게, 나는 손을 내밀었다. 소녀: “이상해요, 이상하다고요.”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한없이 익숙한 손길이 내게 닿는다. 소녀: “이러고만 있으면 왠지 따뜻해져서…… 살아있는 것 같다고 느껴버리는걸요.” 그런 소녀의 손을, 나는 살며시 어루만져주었다. 차갑게 남아있는 상처가, 조금은 따뜻해질 수 있도록.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손이 나의 손에 오랫동안 머무른다. 그 차가움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나는 오랫동안 소녀의 손을 놓지 않고 서 있었다. 소녀 역시 붙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라는 감각이 싫지 않았는지, 그 순간을 놓지 않고 계속 이어갔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런 채로 있었던 걸까. 한 발짝 뒤에서 우리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유미가 내게 말을 건네왔다. 유미: “요컨대, 그 유령이 지금 네 눈앞에 있다는 거지?” 나: “맞아.” 유미: “그 유령 여자애가 뭐래? 같이 돌아간대?” 잠깐의 간격을 두고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응. 그러겠대.” 유미: “그럼, 조금만 더 있다 가자.” 여전히 허공을 껴안은 채로 보였을 내게, 유미가 말했다. 유미: “여기 별, 되게 예쁘단 말이야.” 그 말을 듣고선, 여태껏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던 소녀도 고개를 슬쩍 들어 시선을 별무리 속으로 향했다. 소녀: “정말이네요. 혼자였을 땐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어딘가 아련한 눈빛으로 별빛을 응시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묘한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 날 별빛 아래에서 보았던 소녀의 희미한 미소는 마치 신기루였던 것처럼 사라져 메마른 감정만이 남아있는 듯했다.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소녀의 미소를 볼 수 있는 날을, 나는 언젠가 마주할 수 있을까. 소녀와 함께, 그리고 유미와 함께 왔던 길을 돌아 걸어오며 그런 고민에 휩싸였다. F구역에 도착해 호버크라프트를 잡아타고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녀는 나의 어깨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더니 어느새 스르륵 잠이 들어버린 뒤였다. 유미: “그 유령 여자애랑은 더 이야기 안 해?” 나: “지금 자고 있어. 많이 힘들었나 봐.” 유미는 뒷자리에 홀로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말을 건네왔다. 유미: “이제 돌아가선 어떡하려고?” 나: “다시 알아봐야지. 이 유령 여자애에 대해서.” 유미: “괜찮겠어? 그 유령 여자애, 사람을 죽였다며.” 나: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런 기억을 갖게 된 이유가.” 유미: “다시 알아본다는 건, 계획은 있는 거고?” 나: “…… 놓친 게 있을 거야.” 유미: “놓친 거?” 나: “잘은 모르겠지만……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어.” 유미: “참, 대책 없는 건 여전하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유미였지만, 나를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 “있지, 만약 무언가를 잊는다고 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잊을까?” 유미: “글쎄, 아마 가장 소중한 일이겠지?” 유미는 내가 불쑥 꺼낸 질문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즉답을 건넸다. 나: “왜? 가장 소중한 일은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아?” 유미: “그럼, 가장 소중한 일이라는 게 뭐라고 생각해?” 나: “그거야, 중요한 일이라거나…….” 유미: “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건 항상 곁에 있어서 익숙해진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나: “그런가…….” 정론처럼 들리는 유미의 이야기였지만, 곧장 감이 잡히는 건 아니었다. 파편처럼 흩어진 생각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유미: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나: “내가 잊어버린 기억 중에 뭔가 실마리가 있을까 해서.” 유미: “그렇지만, 너는 그 유령 소녀와는 전혀 관계없었던 거 아냐?” 나: “……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나도 알고 있다. 아득한 과거로부터 날아온 망령인 내가 소녀와의 인연을 전혀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매번, 나의 무의식으로부터 들려왔던 목소리의 주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소녀였다는 점이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어째서일까? 망자로 만난 엇나간 인연의 두 사람이 목소리로 연결되어 있는 건. 단순한 착각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따스하게 들려온 소녀의 목소리가 이번에도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긴 아치교를 지나, 익숙한 사거리에 도착할 때까지도 말이다. 나: “어라, 벌써 도착했구나.” 목적지로 설정해둔 사거리에 도착하자 호버크라프트의 출입문이 열리고, 나는 익숙한 풍경의 거리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소녀를 흔들어 깨워보려 했지만, 소녀는 힘없이 시트에 몸을 맡길 뿐 잠에서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 “…… 많이 힘들었는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네.” 유미: “그럼 집 앞까지 타고 갈래? 내가 여기 내려서 걸어갈게.” 나: “아,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유미의 말에 손사래를 친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소녀를 조심스레 업어 들었다. 그러고는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려다 말고, 잠시 행동을 멈춘 채 유미의 얼굴을 응시했다. 유미: “응? 왜 그래?” 나: “…… 매번 고마워.” 유미: “뭐야, 부끄럽게 그런 인사는.” 나: “으음…… 그래야 할 거 같아서 말야.” 대답 대신, 유미는 나를 향해 입꼬리를 싱긋 올려 주었다. 유미: “잘 가.” 출입문이 닫히고, 나는 사라져가는 호버크라프트를 소녀를 업은 채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늘에 무수히 흩뿌려져 있던 별들은 어느새 거짓말처럼 사라져 규칙적으로 빛을 내리쬐는 가로등 불빛만이 길을 걷는 나를 비출 뿐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흔적으로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소녀의 존재를, 이렇게 눈으로, 피부로, 그리고 소리로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나의 등에 업혀 잠든 소녀의 숨소리가 귓가를 살살 간질였다. 그 소리가 여느 음악의 선율보다 달콤하게 느껴져서였을까. 나는 최대한 천천히, 발걸음을 늦추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녀: “으으으…….” 달콤하게 들려오던 소녀의 숨소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불안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나의 옷깃을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떨리는 숨결과 차가운 손길. 이런 비슷한 상황을 언젠가 마주한 적이 있었기에, 나는 천천히 익숙한 음을 읊조렸다. 뭐든지 괜찮아질 거라는. 그런 의미의 선율을 말이다. 허밍을 하다 말고 위화감을 느끼고선 뒤를 돌아보았을 땐, 언제부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소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녀의 얼굴에 붉은 색채가 맴돌기 시작했다. 옷자락 속으로 얼굴을 파묻고선 표정을 숨긴 소녀가, 그녀답지 않은 투로 더듬대며 말을 꺼냈다. 소녀: “내, 내려오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너무 편안해서 그만…….” 나: “괜찮아. 내 입장에선 오히려 이대로 집까지 업혀 갔으면 하는걸.” 소녀: “…… 정말요? 무겁진 않아요?” 나: “전혀.” 나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디며 허밍 소리를 중얼댔다. 낡은 선율의 틈바구니로, 소녀의 목소리가 섞여든다. 소녀: “신기했어요. 당신과 만나고 난 이후로 언젠가부터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거든요.” 감상에 잠겼던 소녀가 옅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소녀: “그게 이 노래 덕분이었다니. 이제야 알았어요.” 그렇게 말하고선 소녀는 자신의 뺨을 내 어깨에 푹 기대었다. 소녀: “죄송해요. 여태껏 괜히 밤잠 설치게 해서.” 대답 대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주를 계속해나갔다. 등에 닿는 그 감촉을 조금 더 느끼고 싶어서였을까. 의식적으로 느려진 걸음걸이에, 아직 집까지는 한참이나 멀었을 텐데 기억 속의 선율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기억 속의 오르골이 연주를 끝마쳐갈 무렵, 다시 한번 소녀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소녀: “잘은 모르겠지만, 목소리에 온도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요.” 소녀는 그 따스함을 만끽하려는 건지 나의 등어리에 조금 더 자신의 무게를 실었다. 소녀: “따뜻해요.” 흥얼대던 허밍에 마침표가 찍히고, 조금씩 속도를 잃어가던 발걸음이 움직임을 멈춘다. 나: “저기, 있잖아.” 나의 목소리를 듣고선, 등에 파묻혀 있던 소녀가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소녀의 시선이 나의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숨을 가볍게 들이키고는, 나는 소녀에게 나지막이 목소리를 전했다. 나: “내가 실은 과거에서 왔다고 한다면, 믿어줄 수 있겠어?” 소녀: “긴장했잖아요. 무서운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줄 알고.” 나: “무서운 비밀이라니…….” 소녀: “사람을 죽였다거나, 하는 거 말이에요.” 나: “…… 그런 농담, 재미없거든.” 소녀: “그런가요.” 자조 섞인 한숨 소리가 들려오고, 소녀는 다시 나의 등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소녀: “그런데 왜 여태껏 그런 이야기 안 해줬던 건가요?” 나: “이야기할 틈이 없었던 거야. 딱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소녀: “그렇겠네요.” 조금은 불만스러움을 표하던 소녀는 이내 내 말에 수긍하고선 자신의 턱을 내 왼편 어깨에 기댔다. 밀착된 소녀의 시선이 그대로 나의 뺨을 쿡쿡 찔러댔다. 소녀: “시간여행이라면,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건가요?” 나: “그런 건 없어. 시간여행을 한 건, 내 영혼뿐이었거든.” 소녀: “영혼이요?” 나: “으응, 아마도.” 오른쪽으로 살짝 시선을 틀었지만, 이번엔 소녀의 시선이 나의 목덜미를 찔러댔다. 새까만 밤하늘을 응시하며, 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 “잘은 모르겠지만, 유체이탈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 왜, 그런 거 있잖아. 영화 같은 데서 두 사람의 몸이 바뀐다거나 하는 일 말이야.” 소녀: “음…… 그래서 제가 유령이라는 말을 단번에 믿었던 거네요.” 나: “맞아. 영혼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으니까.” 막연하게 시작되었던 이야기는 어느새 풀어둔 실타래를 따라 미궁의 출구로 향하듯 자연스레 이어져가고 있었다. 나: “너를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던 그 텔레이도스코프란 기계도, 원래는 나를 과거로 돌려보내기 위한 기계였어. 아무래도 이젠 그 기계로 너를 없애는 건 어려워 보이지만.” 소녀: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거군요.” 나: “…… 언젠간.” 대답을 유보하려는 듯한 애매한 한 마디였다. 나: “이곳에 온 뒤로부터 줄곧 환청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너를 만나기 전부터, 그리고 너를 만나고 난 이후로도.” 소녀: “어떤 목소리였나요?” 나: “글쎄……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그 목소리들이, 분명 너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이것도 믿어줄 수 있을까?” 소녀: “…… 저랑요?”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그대로 소녀와 시선이 마주친다. 잠시 생각에 잠겨 눈을 깜빡이던 소녀가, 넌지시 내게 말을 건넸다. 소녀: “목소리가 저와 연결되어 있다는 건, 비유적인 표현이겠죠?” 나: “아니, 말 그대로야. 네가 죽음의 색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나는 환청처럼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볼 수 있었어.” 예상 밖의 대답이었는지, 소녀의 고개가 양옆으로 갸웃댔다. 나: “혹시 모르지. 나 혼자만의 망상이거나 착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기억을 되짚었다. 착각이었다기엔 너무나도 생생한 목소리들이 머릿속에 하나둘씩 그려졌다. 나: “내게 보이던 그 목소리는, 헝클어진 털실 모양이었어. 너를 만나기 전까진.” 소녀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나의 이야기를 조금 더 편안히 경청하려는지 소녀의 턱이 나의 어깨에 사뿐히 닿았다. 나: “그리고 너를 만나고 난 뒤로부터, 갈 곳 없이 헝클어져 있던 그 목소리가, 마치 너를 위해 준비되어 있던 붉은 실처럼 네게로 이어졌고……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정말 거짓말 같네.” 머쓱함을 숨기지 못하고, 나는 그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소녀: “그럼, 혹시 지금도 그 목소리가 보이나요?” 나: “아니. 지금은 안 보여.” 오직 나의 귓가에서 속삭이듯 들려오는 소녀의 음성만이, 지금 내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였다. 나: “처음으로 네게 그 목소리가 연결됐던 건 아마 화재 사건을 조사하러 갔을 때였을 거야. 그땐 목소리가 너와 이어진다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소녀: “다음번에도 저와 목소리가 이어졌던 거군요.” 무언가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는 중얼댔다. 나: “맞아. 너랑 같이 학교 옥상에 올라갔을 때. 그날에서야 그 목소리가 너와 이어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소녀: “…… 그랬군요.” 나: “정말,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나 혼자 헛것이라도 본 것 같잖아.” 차라리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지 말라는 반응을 보였다면, 훨씬 더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저 소녀가 나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는 이 상황이, 오히려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게만 와닿았다. 소녀: “아니에요. 그건 분명…… 헛것이 아니었을 거예요.” 나: “…… 어째서?” 소녀: “그건…….” 다시금,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나의 발걸음 소리만이 침묵의 틈을 메운다. 일정한 박자를 이루던 발걸음 소리가 집 앞에 도착해 느린 템포로 변해가기 시작할 무렵. 그 느려진 박자에 소녀의 목소리가 덧대진다. 소녀: “저는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기대 이하의 사람이었던 걸지도 몰라요.” 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소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고백할 게 하나 있어요.” 무덤덤한 목소리와 대조되는 떨리는 손길이 나의 옷자락을 부여잡는다. 발걸음 소리가 멈추고, 나는 소녀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소녀: “언젠가 저의 집에 불이 났었다고 했었죠.” 나: “응, 그랬었지.” 소녀: “그리고 누군가가, 저를 구해줬다고도 말했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 “살아있었을 적의 저는, 원망하고 있었어요. 저를 구해줬던 그 사람을요.” 감정을 배제하려는 듯한 소녀의 목소리는 굴곡 없이 나의 귓가를 맴돌았지만, 그녀의 손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소녀의 손길이, 나의 옷자락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 “불이 났던 그때, 저는 사실 눈을 떴었어요. 하지만 어째서인지,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가족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소녀: “아니, 하지 않았어요.” 처음이었다. 소녀가, 자신을 이야기 속에 담은 건. 소녀: “그리고 그냥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아버린 거죠.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스치듯 지나가는 침묵 뒤로, 소녀의 말이 이어진다. 소녀: “이게 제가 그날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의 뒷부분이에요.” 나: “그날이라면…….” 소녀: “맞아요. 화재 장소를 보러 갔던 그 날. 그곳에서 누군가가 저에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소녀: “그 목소리가 그리는 선을 따라 밖으로 나왔을 땐, 실이 이어진 끝에 당신이 서 있었어요.” 나를 바라보고선 홱 고개를 돌리던 소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소녀: “그 목소리엔, 제 기억이 담겨있었어요. 죽음의 색을 보고도 떠오르지 않던, 마치 어딘가에 숨겨 놓으려던 기억들이요.” 퍼즐 조각이, 하나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소녀: “그리고 저는 그날부터, 그런 제 모습을 드러내기 무서워서 도망쳐버린 거고요.” 나: “죽지 못했다는 건, 그런 이야기였구나.” 소녀: “무의식중에 드러난 진심이었어요.” 나: “자기를 살인마라고 그렇게 빨리 단정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소녀: “한심한 제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소녀가 숨을 골랐다. 따뜻하다는 단어를 떠올리고 싶었지만, 목덜미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소녀: “안 그런 척하면서도, 미움받고 싶지 않았어요.” 소녀: “이런 이야기를 해버리면 정말 저를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까 봐, 겁났던 거예요.” 소녀: “언젠가 제 기억이 모두 돌아와 사라질 수 있게 되는 날, 그전까지만 잠시 거짓말을 하자.” 소녀: “사라지게 되는 순간 모든 걸 털어놓고 볼품없이 사라져버리자.” 소녀: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소녀: “여태껏 당신이 준 따스함이 너무 기분 좋아서. 그래서 이런 짓을 해 버린 거라고 한다면, 너무 변명 같네요.” 나: “…… 학교 옥상에서는, 어떤 기억이 났었어?”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소녀. 그날의 밤하늘과 오늘의 밤하늘은 닮은 구석이 많았던지, 소녀는 금세 떠올랐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소녀: “그날 보았던 여학생과 같은 말을, 저는 같은 곳에서 했던 모양이에요.” 나: “신기한 우연이네.” 소녀: “…… 그러게요.” 나: “…… 그래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옥상에서 했던 거야?” 소녀: “누군가에게, 그곳에서 ‘죽고 싶어’라는 말을 했나 봐요.” 나: “…….”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현관 앞에 멈춰 서서는 멀뚱히 숨을 죽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 “죽고 싶지 않아.” 소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색이 돈다. 소녀: “…… 라고, 마지막엔 겁쟁이처럼 그렇게 이야기했지만요.” 도어락에 손을 올려 문을 열고선 집 안으로 들어선다. 소녀: “따뜻한 목소리였어요.” 집에 도착한 뒤였지만, 소녀는 나의 등에서 내려올 생각이 여전히 없어 보였다. 소녀: “아마 저는, 그 따스한 목소리 덕분에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느꼈던 걸 거예요.” 나: “…… 다행이다.” 소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자그마한 목소리로, 나는 그녀가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그런 소녀를 응시했다. 소녀: “지금은 이렇게, 죽어버리고 말았지만요.” 나: “그랬구나.” 소녀: “이런 제 모습, 되게 흉하고 한심하게 보이겠죠.” 대답 대신, 나는 소녀에게 익숙한 웃음을 흘려 보일 뿐이었다. 소녀: “어쩌면 경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의 등 위가 아니었다면, 이런 이야기 못 했을 거예요.” 그런 한 마디와 함께, 소녀는 나의 등에서 스르륵 몸을 빼냈다. 나: “다행이야.” 소녀: “…….” 나: “곁으로 돌아와 줘서.” 갈대가 쓰러지듯, 소녀는 나에게로 넘어지듯 안겨버려서는 엉켜있던 감정의 실을 몇 분에 걸쳐 풀어냈다. 소녀는 여전히 울지 않았다. 다만, 메마른 흐느낌만을 쏟아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소녀를 보며, 나는 무언가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방 안에 산뜻한 향이 감돌기 시작했다. 샤워를 끝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은 소녀에게선 익숙한 향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먼저 침대 한편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나의 위로, 소녀의 시선이 덮였다. 소녀: “무슨 생각 하고 있었나요?” 나: “그냥. 이젠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관한 생각.” 수건으로 머릿결의 물기를 닦아내는 소녀. 소녀는 자신에게로 나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몸을 눕혀서는 나와 시선의 높이를 맞췄다. 소녀: “저기,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죠?” 나: “그렇게 급한 일은 아냐. 신경 쓰고 있던 건 다른 일.” 소녀: “저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 “으음…….” 와닿지 않는 충고였다. 몸을 돌려, 다시금 시선을 천장으로 옮겼다. 오늘따라 새하얀 벽지로 도배된 천장이 훨씬 더 멀게만 느껴졌다. 소녀: “과거의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나: “으음…… 갑자기 그건 왜?” 소녀: “…… 궁금해요.” 어렵다는 생각이 곧장 드는 물음이었다. 나: “확실히 말하긴 어렵지만, 그리 자랑할만한 사람은 아니지 않았을까.” 소녀: “왜요?” ‘왜요’라니, 질문의 난이도가 한 층 더 높아진 느낌이었다. 나: “뭐라고 할까, 사실 나도 기억이 잘 안 나. 과거의 내가 정확히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에 대해서 기억이 모호한 부분이 있다고나 할까.” 나: “가족 관계라거나, 이름이라거나, 나이 같은 기본적으로 드러나는 나에 대한 것들은 기억나지만. 그런 내가 아닌, 내면의 내 모습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거든.” 나: “어쩌면 무의식중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나에게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것도, 과거의 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랬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소녀: “그렇군요…….”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겠지만, 더 이상의 질문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색한 자세를 되돌려, 다시 시선을 소녀에게로 향했다. 어째서인지 나의 눈치를 보고 있던 소녀는 무언가 덧붙이고 싶어 하는 듯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소녀: “저, 만약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저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요.” 소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었을까. 소녀: “너, 너무 주제넘은 이야기였나요.” 나: “만약 과거로 돌아가게 되면, 나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잊게 될지도 몰라.” 소녀: “어쩔 수 없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그리고 다른 일을 겪다 보면 과거의 기억은 희미해지는 게 당연한 거고…….” 나: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야.” 소녀의 표정에 의아함이 감돈다. 나: “텔레이도스코프를 통해 과거로 돌아간 순간, 다른 차원에서의 기억은 거의 나지 않을 거래. 어쩌면 내가 그곳에 존재했다는 것 정도만, 머릿속에 남을지도 몰라.” 소녀: “마치 기억을 잃은 저처럼 말인가요.” 나: “그러니까, 과거로 돌아가기 전에 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 소녀: “…… 과한 친절이에요.” 소녀에게서 흘러나오는 편안한 향에 취해, 나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 “돌아가는 게 급한 일은 아니라고 했지만, 실은 언제까지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올해 안일지도 모르고.” 소녀: “그럼, 남은 시간을 차라리 다른 행복한 일에 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소녀: “여기서 만든 친구라거나, 그때 봤던 같은 동아리의 여학생이라거나…….” 나: “그렇지만, 내가 사라지고 나면 너는 사라질 수 없게 되잖아.” 소녀: “그렇겠죠.” 나: “너를 불행하게 내버려 둔 채 돌아갈 수는 없는걸.” 소녀: “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 귓등으로도 안 들었군요.” 나: “…….” 침대에 누워 기울어진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에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기대어 있는 소녀만이 유일하게 정방향을 향한다. 그런 것이다. 인생도, 가치관도, 내가 해야 할 일도. 소녀: “있죠, 저는 괜찮아요. 설령 사라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요.” 코앞에서 소녀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소녀: “앞으로 이곳에 남겨져 영원히 세상을 떠돌더라도, 가끔씩 당신과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웃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행복할 거예요.” 나: “거짓말.” 소녀: “맞아요. 거짓말이에요.” 나: “…….” 너무나도 간단히 나의 부정을 긍정한 소녀가, 조금 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 “실은, 자주 떠올릴 거예요. 어쩌면 한시도 빼놓지 않고 떠올릴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제게 행복했던 기억을 아주 조금만 더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 나: “그런 일방적인 기억, 너무 잔인하지 않아?” 소녀: “괜찮아요. 이건, 죗값이니까요. 살아생전에 큰 죄를 지었던, 제게 주어진 죗값.” 소녀: “그렇지만, 달게 받을 수 있으니, 그걸로 괜찮아요.” 이제 소녀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묻어있지 않겠지. 그렇지만 순수하기 그지없는 소녀의 진심에는, 어찌할 수 없는 쌉싸름함이 잔뜩 담겨 있었다. 소녀: “그리고 설령 저를 신경 쓴다더라도, 뭔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요.” 그리고 그 쌉싸름함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실마리를 떠올린다. 나: “…… 하나, 있어.” 소녀: “네에……?” 소녀에게 이어져야 했던 마지막 목소리. 나: “우리가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곳, 거기에 가자.” 소녀: “거긴…… 왜요?” 나: “너와 이어지지 못한 목소리가 있었어. 어쩌면 그 목소리에, 정답이 담겨 있었을지도 몰라.”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든다는 이유에서의 실없는 추측은 나의 머릿속에서 빠른 속도로 신뢰감을 얻고 있었다. 소녀: “…… 저, 졸려요.” 나: “알겠어.” 그 말을 신호로, 방 안의 조명이 차츰 희미하게 변해갔다. 적당한 밝기의 수면 유도등만이 남아 나와 소녀를 비추고, 소녀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눈을 감아버렸다. 숨소리가 맞닿을 정도의 거리. 더는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에서, 나 역시 잠을 청했다.